[제1회 육우당 문학상 당선작]<깊은 밤을 날아서> 이은미 “오공육 둘, 칠오일 셋.” “칠공일구 다섯.” 여기, 소년과 나무가 있다. 소년은 길 건너 ‘로얄고시원’에 살고 있고 나무는 ‘여기’ 살고 있다. 사람들은 몸통에 621번 은빛 번호표가 박힌 나무를 가로수(街路樹)라고 부른다. 소년은 날마다 여기서 가로수인 나무와 지나가는 버스 수를 센다. “칠공이오 넷, 아니 다섯인가?” “이제야 오는군. 칠공육은, 둘.”이 ‘지루한 놀이’를 처음 하자고 한 건 나무였다. “뭐야! 방금 칠공이이 지나갔어. 왜 안세는 거냐?” “아, 미안 칠공이이 셋.” 소년이 버스 세기에 집중하지 않으면 나무는 까칠해진다. 버스 세기는, 이 ‘지루한 놀이’는 나무의 유일한 취미인 것이다. 그건 그렇고 그게 언제였더라? 이 ‘지루한 놀이’를 시작한 건, 이 년 전 늦은 여름이었.. 더보기 [제1회 육우당 문학상 우수작]<병균> 이재영 “왜 나한테 온 거니?” 밖에 비가 온다는 이유로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아서 일까, 아니면 내가 여자였기 때문일까. 경찰서 안은 남자들의 땀 냄새가 둥둥 떠다녔다. 나는 굳이 내 앞에 선 소년에게 땀과 함께 묻어나오는 짜증을 감추려 애썼다. 퇴근이 한 시간 남은 시점이었다. 소년의 손엔 검은색 접이식 우산이 들려있었지만 사용하지 않은 듯 작은 몸에선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소년이 거쳐 온 바닥마다 빗물이 고여 있었다. “경찰 아저씨들은” 소년이 잠시 고민하다가 단어 하나를 골라냈다. “무섭거든요.” 난 빗물에 잠긴 네 다크서클이 더 무서워, 얘, 하려다 꾹 참았다. 소년의 얼굴이 진짜 겁을 먹은 듯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내성적인 성격이구나. 소심한 아이들은 참 다루기 쉬웠다. 이거 공무집행.. 더보기 [제1회 육우당 문학상 우수작]<아프로디테의 소년> 노랑사 다리 위에 서있는 남자의 모습이 가까워지고 있다. -그는 내가 알고 있던 특정한 인물이 아니다. 단지 나의 감각을 자극시키는 신체적인 조건들을 충족한 하나의 대상일 뿐으로 우연히 나의 시야에 포착되었다.- 남자의 셔츠위로 드러난 가슴 굴곡에 나는 셔츠 아래 가려진 그의 단단한 육체를 가늠할 수 있었다. 그의 넓은 어깨와 발달된 팔의 근육은 그를 견고하고 정밀한 하나의 구조물처럼 보이게 했다. 그 구조물 사이엔 내 몸의 구멍을 채우고 나를 희열에 차게 할 단단하고 거대한 물건이 달려있을 것 같았다. 그와 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그의 육체가 내 시야에서 부피를 키워가면서 나의 욕망도 부풀었다. 하지만 나의 욕망과 그의 육체는 평행하는 운동이었다. 이내 허전함과 외로움이 그로부터 나를 차단하였.. 더보기 [제1회 육우당 문학상 우수작]<아직 말할 수 없어> 김현중 1 보도블록 위로 점점이 멍이 들기 시작했다. 초저녁부터 으스름이 깔리는가 싶더니 이내 비가 쏟아졌다. 혹시나 해서 들고 온 우산을 펼쳤다. 여름 더위가 아직 덜 여물었는지 바람이 제법 차갑다. 야간 자율학습도 빼먹고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집안에 들어서니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후 다섯 시, 주택가 아이들의 목소리가 놀고 있었다. 주인도 못 알아보는 썰렁한 거실을 지나쳐 방으로 들어가 교복을 벗어 던졌다. 오랜만에 잡힌 약속이라 그런 지, 들뜬 기분에 설레어 그만 어수선하게 옷장을 뒤집고 말았다. 이리저리 여유 부릴 시간은 없었다. 청바지와 늘어난 티 하나를 걸치고,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대충 넘기다가 새까맣게 그은 팔뚝을 보았다. 축구를 할 때면 소매를 어깨까지 걷어 올리는 버릇 탓에, 여.. 더보기 [제1회 육우당 문학상 우수작]<아메리카노> 낌 청명한 여름이었다. 하늘은 시퍼런 물감을 풀어 놓은 것 같았고, 흰 구름이 손가락으로 찍어 바른 양 툭툭 떠다니는, 그런 좋은날에, 나는 시원하다 못해 추운 카페에서 덜덜 떨고 있었다. 추워서 떠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이제 곧 있으면 B가 올 것이고, 곧 닥칠 그 만남이 나를 혹독한 긴장에 몰아넣고 있었다. B는 7년째 함께인 친구이다. 중학교 1학년, 같은 반인 그 애를 처음 본 순간 토끼가 한 마리 떠올랐다. 피부는 분필가루마냥 하얗고 커다란 눈망울은 겁에 질린 토끼 같았다. 내가 나의 정체성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나는 내가 그녀에게 반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 애는 내 시선을 끌었다. 나는 그 애와 친해지려했고, 친해졌고, 그 만남은 지금까지도 순수한 우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7년 동안 우.. 더보기 이전 1 ··· 3 4 5 6 7 8 9 ··· 1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