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성소수자, 미래의 시간을 찾아서 | ||||
<법 앞에 선 성소수자> 청소년 동성애자 (끝) | ||||
<일다>는 공익변호사그룹 <공감>과 공동 기획으로, 우리 법이 성소수자 인권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살펴보는 <법 앞에 선 LGBT> 기사를 연재합니다. LGBT란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를 칭하는 용어입니다. 필자 정명화님은 연세대학교 총여학생회와 <공감>에서 인턴으로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소송과 판례 분석을 통해 성소수자 인권 현황을 보여줄 것입니다. –편집자 주 육우당 추모제에서 만난 청소년 성소수자들
그 해 봄에 국가인권위원회가 동성애자 차별조항을 삭제하도록 권고하자,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동성애는 소돔과 고모라의 유황불로 심판"해야 한다고 저주를 퍼부었다. 그리고 육우당은 유서에 “내 한 목숨 죽어서 동성애 사이트가 유해매체에서 삭제되고, 소돔과 고모라 운운하는 가식적인 기독교인들에게 무언가 깨달음을 준다면, 나 죽은 게 아깝지 않아요” 라고 써놓았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2003년의 봄을 싫어하게 됐을 것이다. 동시에 그 봄을 결코 잊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해마다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그들은 진저리 나는 기억에 시달렸지만, 동시에 더 이상 ‘청소년 성소수자의 자살’이 당연하지 않은 사회를 소망하며 매년 육우당을 추모하는 행사를 열기로 했다. 올해 봄 네 번째를 맞는 육우당 추모제에서는, 청소년 성소수자 모임의 회원들이 부스를 세우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손수 만든 동성애 인권 홍보물을 나누어주면서, 이성애주의 사회에 가뿐히 한방을 날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생기발랄함에 금세 반해버렸다. 함께 갔던 다른 친구들도 그랬던 모양인지, 우리는 그 이후로 종종 청소년 성소수자 활동가들의 빛나는 에너지에 대해 호들갑스럽게 이야기하곤 했다.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세대 단절 1997년 청소년보호법이 처음 제정되었을 때, 성소수자 사이트들에서는 ‘청소년의 가입을 허락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한바탕 논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논쟁을 이끄는 사람들은 주로 성인들이었는데, 이들은 정부에 의해 사이트가 폐쇄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외에도, 청소년 성소수자에 대한 염려를 자주 표현했다. 그 염려의 자세한 내용은 이 사이트에 들어오는 청소년이 성소수자로 자라나 장차 자신과 같은 괴로움을 당할까 하는 걱정이었고,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청소년의 가입을 저지해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졌다. 이러한 논쟁의 결과로 많은 사이트에서 청소년 성소수자의 가입을 불허했고, 이미 가입되어 있는 청소년은 커뮤니티에서 강제로 탈퇴시키기도 했다. 이로 인해 성소수자 커뮤니티에는 세대 간의 깊은 단절이 생겨났고, 청소년이나 성인이나 모두 자신과 비슷한 세대끼리만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이러한 단절은 청소년과 성인 모두에게서 미래를 박탈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젊은 사람들이 주로 가입해있는 성소수자 커뮤니티에는 종종 "그런데 40대에도 레즈비언으로 사는 사람이 있나요?"하는 고민 글을 찾아볼 수 있다. 세대를 어우르는 만남은 지금 내가 속해있는 현재를 넘어서는 다른 시간대에 속해있는 존재와 접속하고 교류할 수 있는 창구가 되어준다. 3세대를 넘어서는 대가족에서 성장하는 아이가 조부모와 부모와 또래를 동시에 만나면서, 탄생과 사랑과 죽음이라는 인간 생애의 리듬을 자연스럽게 습득해가듯이. 그러나 성소수자의 세대는 법의 압박에 못 이겨 단절을 택했기 때문에, 청소년 성소수자는 자신이 살아나갈 미래를 덧대어 볼 수 있는 역할모델을 상실했다. 또 성인 성소수자는 자신이 사라진 미래에 자신과 닮은 고민과 사랑을 품은 채 살아나갈 후대의 사람들을 상상하지 못하게 되었다. ‘정상가족’ 족보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미래 그러므로 육우당 추모제에서 나와 친구들이 느낀 행복감은, 사라졌던 미래가 다시금 나를 향해 돌아오리라는 기대감에서 나온 것이다. 그 자리에서 우리, 청소년과 성인을 아우르는 거대한 집합은 모두 육우당의 죽음을 기억하고 그의 부재에 아파하면서, 일종의 제사를 지내는 것 같았다. 지금의 제사는 이성애 혈연가족 내에서만 치러지지만, 더 오래 전 부족사회에서는 지금과 다른 모습을 띠고 있었다 한다. 그곳에서 제사장은 모여 앉은 부족민들 앞으로 죽은 자를 소환하여, 죽은 자의 이름으로 산 자의 잘잘못을 심판하였는데, 이때만큼은 현세의 권력이 변명으로 통하지 못했다고 한다. 기존의 지배질서에서는 아무리 강자의 위치를 점하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조상님의 공정한 판결 앞에서는 그 동안 얻었던 부당한 이득을 모두 반납해야 했던 것이다. 아주 오래 전, 제사는 죽은 자의 존재를 매개로 산 자의 질서를 상대화하고, 그를 통해 공동체의 정의를 확립하는 장소였다. 조상이 예지하는 미래, 우리 모두가 오래 전부터 꿈꾸어왔던 미래를 근거로 부당한 현재를 교정해 나가는 위한 공간. 이전에 나는 근거가 희박하다고 생각하여 ‘인류애’를 말하는 이들을 비웃곤 했다. 그러나 육우당을 소환하는 제사장 앞에 서서, 나는 그들의 심정을 약간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인류애는 내가 알지 못하는 죽은 이들과, 내가 만나지 못하는 태어날 이들에 대한 묵직한 애정과 책임감의 다른 이름이 되기도 한다. 그 순간 다른 세상을 살아온 존재들은 지금 내가 서 있는 현재 한 가운데로 와르르 들이쳐 오면서, 나에게 다른 과거와 다른 미래에 대한 상상을 펼칠 의무를 부여한다. 예를 들어 이러한 상상: 만약 중학교 때 레즈비언을 어둠으로 묘사하는 다큐멘터리를 보지 않았다면, 그날 오후 나와 친구들은 어떤 대화를 나눴을까? 혹은 학생인권조례에 근거해 다양한 성별정체성을 긍정하는 성교육을 받았다면, 그 후에 나는 어떤 연애를 했을까? 혹은 어떤 직업을 가졌을까? 어쩌면 그날 성소수자들은 서로에게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지평, 그러니까 미래라는 시간을 서로에게 선물했던 것은 아닐까? 그곳에서 어른들은 청소년들의 들꽃 같은 얼굴에 홀딱 반해서는, 자신이 결코 살지 못하는 먼 내일에 유토피아를 건설해내고 싶은 충동을 가슴에 들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청소년들은 어른들의 주름살 안에서 세월을 살아내는 기술을 감지하면서, ‘정상가족’의 족보에서는 찾아낼 수 없었던 자신의 행복과 고통이 찬찬히 늙어가는 표정을 보았을 것이다. 아마도 이런 식으로, 우리는 조금씩 잃어버렸던 미래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 ||||
기사입력시간 : 2012년 12월08일 [10:43: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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