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수자 친구들을 기억하며육우당 10주기 기도회 추모사 (전문)
당신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주어져 다행입니다.
사람 죽는 일에 너무나도 무감각해진 이 세상에서, 지금 여기는 잊혀져간 무명의 성소수자 친구를 기억하려는 자리입니다.
저는 어느 날 대한문 쌍차 노동자들의 농성장에 서 있었습니다. 얼굴도 이름도 없는 스물 네 명의 영정을 앞에 두고 한 친구가 방명록을 적고 있었습니다. 거기엔 뜻밖에도 육우당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얼굴도, 이름도 없이 이 세계에서 잊혀지는 것으로는, 어쩌면 해고된 노동자나, 유서도 없이 세상을 떠난 성소수자나, 불난 집을 탈출하지 못해 죽어간 장애인이나, 여기까지 와서 비명에 살해당한 이주 여성이나 매한가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고개를 들어 당신의 영정 사진을 봅니다. 아마 언젠가는 살아 있었을, 생기가 도는 뺨과 슬쩍 배인 땀 냄새와 다양한 표정들로 세상과 소통했을 당신의 얼굴이, 사진도 없는 검은 영정 위로 떠오릅니다.
우리는 목소리가 없습니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자들은 권리도, 공간도, 삶도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당연한 삶이 당신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것에 마음 아파합니다.
A 님, 당신이 고단한 마음을 거두지 못한 채, 한 성소수자 인권단체의 사무실 계단에 목을 맸을 1998년 5월 17일 새벽, 신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당신이 가족으로부터 튕겨져 나와 춥고 허름한 사무실에서 혼자 사발면이라도 먹으며 허기를 채웠을 시간들을 생각해봅니다. 고립감이 희망을 잠식할 때,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가족에게 차마 말할 수 없어 외롭던 성소수자들이 A, 당신과 같습니다. 당신이 왜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싶었는지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만 한없이 외로웠던 마음 내려놓고 편히 쉬소서. 당신이 잊혀진다면 우리도 여전히 버려질 것 아니겠습니까.
B 님, 저는 3년 전 억수같이 쏟아지던 빗속에서 하얀 비닐 우비를 입고 퍼레이드 차량에 장식을 단단히 고정하고, 차량에서 내려오던 제 손을 꼭 잡아주었던 당신을 여전히 기억합니다. 당신이 사고로 떠난 종로 낙원동 골목에 있던 작은 바에서 비에 젖은 옷과 신발을 말리며 밤새도록 술 한 잔을 걸치던 그날도 생생합니다. 당신을 보내고 난 후 사무실에 모여 전이나 떡 따위를 안주삼아 당신에 관해 이야기할 때에도 여전히 떠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좀 더 예쁜 사진을 고르지 못해 미안합니다. 그건 당신이 사진 찍기를 극구 싫어했기 때문에. 하지만 당신의 얼굴을 타고 흐르던 빗줄기가 아직도 손에 닿을 듯합니다.
C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기까지 저는 몇 년간 C의 부재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고등학생이던 때 동성애자인권연대에 처음 나와 즐겁게 지내던 시절을 돌이켜 봅니다. 그녀는 MTF 트랜스젠더였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트랜스젠더로서 돈을 벌거나 수술비를 마련할 길도 없었기에 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업소를 방문했던 낯선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죽음 이후에도 우리는 살아있을 적 알던 지인들이 C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할까 두려워 그 삶을 충분히 기억해주지 못했습니다. 작은 체구에 밝은 미소를 지니고 있던 C, 메이크업을 공부했던 C가 퀴어 퍼레이드에 참여하는 성소수자 친구들을 예쁘게 분장해주던 그때가 그립습니다. 편견과 혐오에서 자유로워질 때 비로소 그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이 다시 우리 앞에 등장할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그래서 더욱 애도합니다.
D, 우리는 생전 그렇게 그를 불렀습니다. 그녀는 2003년 육우당이 세상을 떠나자 너무 가슴이 아파 몇 날을 울었다 합니다. 그의 죽음이 늘 마음에 맺혔던 그녀는 2004년 동성애자인권연대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레즈비언 동생들에게 늘 큰 형님으로 불리던 그녀는 가난한 집안 형편과 잔병치레로 고생은 많이 했지만 마음이 넉넉하고 단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살아있었다면 지금 성소수자 인권을 위해 여전히 노력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2008년 8월 그녀가 악성 뇌종양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던 그날이 여전히 생생합니다.
파트너였던 저에게도 그녀의 생애 마지막 8개월은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한편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내 존재가 지워지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녀의 가족들에게 끝까지 시련을 당했고 우리 둘 모두 큰 상처를 가슴에 새겼습니다. 결국 그녀가 묻힌 곳조차 알지 못한 채 우리는 생전 그녀와 다녔던 교회에서 그녀의 기일을 챙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병원에서도, 가족 속에서도, 장례식장에서도, 어떤 곳에서도 우리와 함께하던 공동체를 벗어나면 차가운 현실이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 우리를 여전히 힘들게 합니다. 언젠가 함께 당신이 잠들어 있는 곳을 찾아 소풍을 떠나고 싶습니다.
여기서만 그의 이름 ‘○○○’을 불러봅니다. 우리는 여전히 그가 선물한 성모 마리아상과 십자가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가 성소수자 인권을 위해 쓰이길 바라며 남긴 전 재산 34만원이라는 씨앗은 지금 잎이 무성한 나무로 자라났습니다. 조심스레 우리에게 동성애자인권연대에서 일해도 되는지 물어본 후 이곳에 왔을 때의 반가움을 아직 기억합니다. 함께 거리에 나서고, 청소년보호법의 동성애자 차별조항을 없애기 위해 글을 쓰고, 술 한 잔 하며 끼를 떨던 행복감을 기억합니다. 그가 그렇게 삶을 놓을 줄 몰랐습니다. 뒤늦게 그가 활동하던 시인 카페에서 작별의 글을 마주하고 가슴을 치던 때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당신이 조금만 더 우리와 함께했더라면, 가던 길을 돌아서 우리 손을 잡은 기독교인들을 만났더라면 어쩌면 절망을 그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요. 하지만 당신의 죽음 이후 우리를 찾아온 한국기독청년학생연합회 청년들은 당신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었다고도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많은 성소수자 친구들을 보냈건만 단 한 번도 성소수자의 얼굴로, 동성애자인권연대의 이름으로, 우리의 언어로 당신의 장례를 치러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꿈꿉니다. 성소수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들이 더 많아지기를. 억눌린 자들에게 가해진 고통이 적어도 나의 고통으로 전달되기를. 애도 다음에 연대가 있기를. 다시는 이런 사람들이 없도록 연대 속에서도 애도의 마음을 깊이 간직해주기를 말입니다.
또한 꿈꿉니다. 우리의 삶과 죽음이 진정으로 자유롭기를. 못 다한 삶을 더 이상 보지 않기를. 우리의 장례식장에서는 당신의 아름다웠던 시절을 마음껏 추억하기를. 무지개가 당신의 마지막 길을 위해 일렁이기를.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슬퍼할 수 있기를. 무엇보다 당신의 죽음이 존중받을 수 있기를.
다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저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기”에, 나의 슬픔을 모두의 슬픔으로 변화시켜야 함을 말입니다.
오늘 육우당의 10주기를 맞아 절망한 자들에게 복되다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곽이경 (동성애자인권연대 활동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기사 원문: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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